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상식의 반전)

2020. 9. 21. 22:33핫!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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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 많은 교양인을 위한 상식의 반전 101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茄)는 남의 애를 끊나니.”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1545~1598). 그는 임진왜란 때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나라를 구한 시대의 영웅이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명나라가 연합해 침략국인 일본을 패퇴시킨 국제 전쟁이었다. 조선 중기인 1592~1598년(선조 25)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는데, 임진년에 처음 발발했다고 해서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1597년의 제2차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만을 따로 정유재란이라고도 부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임진왜란 후 1597년 다시 조선을 침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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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전두장면

 

이순신 장군은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는데, 이는 세계 해전사에 유례없는 전승 기록이다. 이순신 장군의 전술은 미국, 영국, 일본 등의 해군사관학교 교재에도 실려 있을 만큼 유명하다.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전라도 수군은 1592년 5월 1차 출전(옥포해전)에서 무려 40척의 왜선을 격침시켰다. 조선군이 거둔 사실상의 첫 번째 승리였다. 조선 수군이 2차로 출전한 사천해전에서는 거북선이 최초로 출동했다. 사천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왼쪽 어깨에 조총을 맞는 큰 부상을 입었다.

 

 

 

한산대첩은 진주성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불린다. 1592년 7월 7일 왜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鶴翼陳, 학이 날개를 편 듯이 진을 쳐 적을 측면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전술)을 펼쳐 적 함대를 거의 격침시켰다. 1592년 9월 1일 부산포에서 왜선 100여 척을 무찌른 것도 대표적인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장군의 오른팔인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 등을 비롯해 측근 6명이 전사했다.

 

이순신 장군은 왜군의 정보전에 휘말려 고초를 당했다. 정유재란 발발 직전 일본은 조선 정부에 거짓 정보를 흘렸고, 조정은 이순신 장군에게 출동을 명했다.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던 이순신 장군은 명령을 거부했다. 이에 조정은 그를 파직한 뒤 대신 원균을 임명했다. 1597년 9월 16일 백의종군에서 풀려난 이순신 장군은 통제사로 돌아와 단 13척의 배를 이끌고 왜선 31척을 격침시켜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었고, 조선의 해상권을 되찾았다. 이순신 장군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고 만다.

 

이순신 장군 하면 거북선을 떠올릴 만큼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서울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도 거북선이 놓여 있다. 왜군들은 거북선을 메쿠라 부네, 즉 소경배(盲船)라고 불렀다. 바깥에서 아무리 살펴봐도 배의 눈에 해당하는 것이 보이질 않아 붙여진 이름이다. 거북선은 명실공히 조선 최초의 장갑선(겉을 철판으로 덮어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배)이며 조선 수군의 용맹성을 보여준 대표적 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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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처음 발명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거북선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던 배였다. 신라시대 장보고는 동아시아의 바다를 지배한 청해진(淸海鎭, 전남 완도에 있던 군사기지)을 경영하면서 배 위에 방어용 등껍질을 씌운 독특한 전투선을 개발했다. 이 배는 속도가 빠르고 활이나 창을 이용한 적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마치 거북선과 흡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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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거북선은 고려 말부터 개발되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 태종과 세종 때에도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태종실록》 13년 2월 5일 기록에 “임금이 임진강을 건너다가 귀선(龜船)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모양을 구경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엄밀히 말하면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처음 발명한 사람이라기보다는 거북선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전술을 개발한 사람이었다. 기존의 거북선 모양을 바탕으로 그 위에 철갑을 씌우고 여러 기능을 보완해 많은 대포를 장착할 수 있게 발전시킨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타고 다녔던 거북선도 장군의 막료(幕僚)였던 나대용(羅大用) 군관이 개발했다.

사실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주력 전투함은 거북선이 아닌 판옥선(板屋船)이었다. 명종 때 개발한 판옥선은 갑판이 2층 구조로 돼 있다. 그 덕분에 노를 젓는 노군들은 안전하게 노를 젓고, 군사들은 2층으로 올라가 적과 싸울 수 있었다. 배를 탈 수 있는 인원도 200명 정도여서 기껏해야 수십 명을 태울 수 있는 왜선보다 훨씬 컸다. 판옥선에는 많은 대포를 장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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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은 판옥선의 2층 갑판 윗부분에 둥근 덮개를 덮고 철갑을 씌운 것이다. 거북선은 승원 전원을 개판으로 보호하면서 쉽게 적선에 접근하고, 기상천외한 모습으로 적을 심리적으로 위압하는 훌륭한 군선이었다. 하지만 단점도 있었다. 노군과 활을 쏘는 사수, 포를 발사하는 포수 등 전원이 모두 개판 밑의 한 장소에 모여 있어 전투 효과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북선은 판옥선을 보조하는 정도였고, 실용성도 떨어져 정유재란 때는 한 척도 제작하지 않았다. 거북선은 임진왜란 후에 훨씬 많이 만들어졌다. 20척에 가까운 거북선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수영 곳곳에 배치됐다. 현재 복원된 거북선은 조선 후기에 쓰던 것을 참고해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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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은 철갑선이 아닌 나무로 만든 배다. 이순신 장군이 직접 쓴 글이나 주변 인물들이 쓴 글에는 철갑선이란 언급이 전혀 없다. 이순신 장군은 왕에게 거북선을 설명하면서 ‘등에 칼 송곳을 심었다’고 말했다. 거북선은 배의 윗부분을 판자로 덮고, 거기에 칼 송곳을 꽂은 것이다. 칼 송곳을 꽂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판자는 철판이 아니라 나무판이 된다. 뾰족한 쇠 가시를 촘촘하게 꽂은 등껍질 위에 물에 흠뻑 적신 5톤에 달하는 거적을 얹었기 때문에 불 공격에도 끄떡없었다.

[네이버 지식백과]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의심 많은 교양인을 위한 상식의 반전 101, 2012. 9. 24., 김규회, 황선정, 송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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